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빈 공방전 (문단 편집) == 영향 == 2차 빈 공방전을 기획했던 오스만 제국의 실권자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패전 책임을 물어 처형당했으며[* 사실 실권자 무스타파는 하도 강압적으로 일처리를 하다보니 정적이 많았다. 그래서 정적들은 이를 빌미로 벌떼같이 달려들어 술탄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하자고 했던 것이다.] 메흐메트 4세도 패전의 책임을 이유로 [[예니체리]]에게 폐위당했다. 그러나 그만한 국력을 각출하고도 실컷 얻어맞아 체면을 구긴 제국은 더 이상 이미지를 만회할 수 없었다. 전쟁을 통해 엄청난 인력과 물자를 상실한 것으로도 모자라 영토마저 축소되고, 사실상 만방에 종이호랑이임을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이 명백히 쇠퇴하고 있음이 유럽인들의 눈에도 분명해진 것이 바로 이 때부터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강성해진 북쪽의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의 영토를 노리고 침투해오면서 더는 동서로 신경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을 다시 한번 막아낸 합스부르크 왕가는, 그게 비록 [[폴란드-리투아니아|폴란드]]의 구원 덕분이긴 하지만 아무튼 국위를 한층 떨치고 국내의 분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또한 [[헝가리 왕국]]을 완전히 합병할 수 있었고,[* 다만 헝가리의 완전한 복속은 1711년, 서트마르 조약으로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봉기를 진압한 이후다.] 진정한 의미의 [[오스트리아 제국|제국]]으로 나아가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이후 혼란 끝에 100년 후 [[폴란드 분할|오스트리아와 러시아, 프로이센에 의해 3차례의 분할을 당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여담인데 당시 오스만 제국군 전사자들이나 포로들이 가지고 있는 게 커피 원두였는데 오스트리아군은 이걸 서로 가지려고 싸우다가 몇몇은 칼을 뽑아 싸우다가 서로 다치거나 죽는 일도 벌어졌다! 그만큼 당시 커피 원두는 비싸고 귀했던 물건이었다. 심지어 당시 프랑스가 오스트리아 지원을 외면하는 댓가로 오스만 측에게 받은 보답이 커피 원두였을 정도. 커피 원두를 준다고 할때 루이 14세가 무척 기뻐했다는 일도 있다. 물론 이웃 라이벌 오스트리아가 한방 먹어봐라는 계산도 있었겠지만. 어째든 이때 맛 좀 본 오스트리아에서 커피가 크게 유행하게 되고 이후 유럽 전체가 커피에 빠지게 된다. 유럽인들 입맛에 너무 써서 좀 레시피를 바꾼게 [[카푸치노]]이다. 비록 쇠퇴하기 시작했다고는 해도 오스만 제국은 제2차 빈 공방전 이전까지는 여전히 위명을 떨치는 대상이었고, 쉽게 싸움을 걸기 힘든 제국이었다. 빈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재우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튀르크 악마들'이 와서 잡아먹는다고 겁을 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1683년의 2차 빈 공방전으로, 이러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빈을 포위했던 오스만 세력이 어처구니없이 무너진 것은 유럽과 오스만 모두에게 충격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대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오스만과 합스부르크 & 유럽 제국 사이의 세력 균형에서 영구적인 반전의 기점이 되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은 여전히 적지 않은 세력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당장 바람 앞의 등불이 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유럽의 군주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기보다는 자기들끼리의 싸움에 더 집중한 탓도 있어서, 오스만 제국은 이후에도 2세기 가까이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베네치아에게 뺏겼던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전쟁으로 다시 되찾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분위기가 대두하고 [[러시아 제국]]의 남하가 본격화된 19세기 후반 이후 결국 세력 구도는 명백하게 오스만에서 유럽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현상유지정책의 영항이 컸다. 즉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면서 되도록 유럽에서는 전쟁을 벌이지 않으려 했고, 그게 어느 정도 먹혀든 것. 다만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와 생각이 달라서 적극적인 확장정책을 추구했고, [[제1차 세계 대전|그 결과는...]] 이 전쟁은 14-17세기동안 중유럽의 최강국이었던 폴란드의 마지막 불꽃이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폴란드는 이 때 도와 주었던 오스트리아가 나중에 [[폴란드 분할|자국을 찢어먹는 데에]] [[배은망덕|한몫 했다]]고 소비에스키를 욕했지만, 폴란드의 친서방화가 강해지는 지금은 그래도 폴란드가 서구를 위해 크게 공헌한 것이 있다고 다시 소비에스키를 추앙하는 분위기이다.[* 오스트리아는 폴란드를 분할시킨 세 나라들(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중에서 폴란드와의 악연이 그나마 덜한 편이다.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들과 달리 각각 [[루터교회]]와 [[정교회]]를 믿어서 자신들 치하의 폴란드인들을 탄압하면서 가톨릭 신앙까지 탄압한 반면, 오스트리아는 폴란드와 같은 가톨릭 국가인 관계로 적어도 종교적으로는 자신들 치하의 폴란드인들을 탄압한 적이 없고, 정치적으로도 독일, 러시아와는 달리 유화책을 썼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의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힘들며, 폴란드와의 관계가 괜찮은 독일어권 국가는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룩셈부르크]] 정도다.[* 보면 알겠지만 전부 폴란드와 역사적으로 관계가 없다시피한 나라들이다. 그나마 셋 다 모두 독일의 전신 중 하나인 프로이센 왕국과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국이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관련은 없다. 게다가 스위스는 [[프랑스어]], [[이탈리아어]]권 국가이기도 하며 리히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의 제후국이었지만 현재는 외교 등 대부분을 스위스에 위임한 중립국이고 룩셈부르크 역시 프랑스어권에 더 가깝다.]] 한편 제2차 빈 공방전의 원인이 된 퇴쾨이 임레는 빈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둔 합스부르크 제국이 반격을 개시해 오스만 제국 편에 가담한 상 헝가리의 반란 진압에 들어가자 필사적으로 저항해보았지만 중과부적으로 밀렸고, 1685년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쳤다. 이후 에르데이 공작으로 선출되어 오스만군의 지휘관으로 오스만군에 종군하였지만 젠타 전투에서 [[사부아 공자 외젠]]에게 개박살나고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대튀르크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이 승리를 거두면서 헝가리 독립시도를 위한 그의 꿈은 무산되었다. 1700년, 헝가리 탈환을 위한 마지막 시도가 실패로 끝나며 부인 일로나 즈리니와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고, 1705년에 [[이즈미트]]에서 사망했다. 그렇지만 퇴쾨이 임레는 헝가리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훗날 [[부다페스트]] 영웅광장의 14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결국 그의 요청이 나비효과가 되어 헝가리 전역의 오스트리아 지배를 불러일으켰지만 헝가리 독립을 향한 의지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헝가리 독립에 대한 의지는 양아들이자 부인 일로나 즈리니의 친아들 [[라코치 페렌츠 2세]]가 계승하여 1705~1711년 라코치 독립 전쟁으로 이어진다.---하지만 양아버지에 이어 라코치 페렌츠 2세도 실패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